표트르 바그라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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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1765년 바그라티오니 왕조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의 장군이었다. 그는 러시아-체르케스 전쟁, 러시아-투르크 전쟁, 핀란드 전쟁,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805년 홀라브룬 전투와 1812년 보로디노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1812년 조국 전쟁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전략적 통찰력과 용맹함은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도 등장한다. 그의 이름을 딴 작전, 지명, 기념물 등이 존재하며, 현재까지도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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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 |
원래 이름 | პეტრე ბაგრატიონი (페트레 바그라티오니) |
출생 | 1765년 7월 10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아스트라한 현 키즐랴르 |
사망 | 1812년 9월 24일 (47세)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 현 시마 |
매장지 | 러시아 보로디노 전장 |
별칭 | 육군의 신, 독수리 |
군사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 |
군종 | 러시아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782년 – 1812년 |
최종 계급 | 보병대장 |
지휘 | 수보로프의 이탈리아 전역 선봉대 수보로프의 스위스 전역 선봉대 제6 예거병 제22 보병 사단 근위 예거병 근위 예거 연대 홀라브룬에서 러시아 후위대 아우스터리츠에서 연합군 우익 아일라우에서 러시아 후위대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 러시아군 몰다비아군 제2 서부군 보로디노에서 러시아군 좌익 |
주요 전투 | 러시아-체르케스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1792년) 오차코프 포위전 (1788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프라가 폭풍 이탈리아 전역 브레시아 점령 베르가모 점령 아다 강 전투 레코 전투 제1차 마렝고 전투 트레비아 전투 노비 전투 스위스 전역 클렌탈 전투 글라루스 전투 제1차 슈반덴 전투 제2차 슈반덴 전투 핀란드 전쟁 로칼락스 전투 헬싱키 마을 상륙 러시아-튀르크 전쟁 (1806년-1812년) 라세바트 전투 타타리차 전투 도브루자 전투 실리스트리아 포위전 나폴레옹 전쟁 암스테텐 전투 쇤그라벤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하일스베르크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살타놉카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셰바르디노 전투 보로디노 전투 |
훈장 | |
훈장 | [[파일:Ierus a7.jpg |40px]] [[파일:Order of Saint Alexander Nevsky Insignia.jpg|34px]] [[파일:Star of the Order of St Anna.jpg|39px]] [[파일:REO-GC breast star.JPG|43px]] [[파일:Order of Saint Andrew.svg|40px]] [[파일:Order of St. George, 4th class.jpg|37px]] [[파일:Vladimir-star.jpg|37px]] [[파일:Ord.MariaTeresa-COM.png|40px]] [[파일:Cavaliere di gran Croce Regno SSML BAR.svg|40px]] [[파일:Order of the Black Eagle - Ribbon bar.svg|40px]] [[파일:St.AndrewOrder.png|40px]] |
무기 | [[파일:Фрачный знак--.jpg|40px]] 금검 용기상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결혼 전 성: 스카브론스카야) |
가족 | 이바네 (아버지) 로만, 알렉산드르 (형제) 표트르 (조카)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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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1782년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중사로 캅카스 머스킷 연대에 배속되었고, 몇 년 후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788년 투르크와의 전쟁에 종군하여 대위까지 진급했다. 1792년부터 키예프 기마추격병연대에서 근무했고, 1794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에게 폴란드 분할 시기에 무훈을 인정받아 소피아기병연대장이 되었다. 1799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전선에서 브레시아 공략에 성공하여 러시아 귀국 후 근위기병대대장이 되었다.
1805년 홀라브룬 전투에서는 5배가 넘는 적군과 싸워 휘하 장병 절반을 잃으면서도 쿠투조프 장군의 본진 퇴각을 엄호하여 적군을 퇴각시켰다. 같은 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조아생 뮈라와 장 란이 이끄는 프랑스군 좌익과 대치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1807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 등에서 용맹하게 싸웠다.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는 제21 보병사단을 이끌고 얼어붙은 핀란드 만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행군으로 올란드 제도를 탈취했다. 1809년에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몰다비아 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과 싸워 보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당시 바그라티온은 서부 제2군을 지휘했으나, 모길료프에서 패배하여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지휘하의 주력 부대에 편입되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 좌익을 지휘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1812년 9월 12일 숙모의 영지였던 시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과 용맹함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묘사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보로디노 전장에 그의 영예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유해는 그가 죽은 장소에 안치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1765년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무크라니 가문 출신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바그라티온 대령의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공부했으며, 아버지로부터 페르시아어, 터키어,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를 배웠다.1782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여 아스트라한 보병 연대 소속 카브산 소총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남동생 로만 바그라티온은 1791년 13세의 나이로 추구예프 코사크 연대에 코사크 부사관인 ''우랴드니크''로 입대했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 제국군의 장군이 되었다. 바그라티온은 수년 동안 러시아-체르케스 전쟁에서 복무했고, 오차코프 포위전 (1788년)에 참전했다.
1792년 대위로 임명되어 키예프 기병 연대로 전출되었고, 1794년에는 소피이스키 카라비니어 연대로 전출되었다. 그는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전했다. 이후 대령(1794년 10월 26일), 대령(1798년) 및 소장(1799년)으로 연이어 승진했다.
1799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및 스위스 원정에 동행하여 브레시아와 베르가모를 점령하고, 아다 강과 클뢴 계곡에서 선전하여 특별한 명성을 얻었다. 1798년부터 1799년까지 제6 샤쇠르를 지휘했으며, 1801년부터 1802년까지는 황실 근위 샤쇠르를 지휘했고, 1802년부터 1805년까지는 예거 여단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2. 2. 나폴레옹 전쟁 초기 활약
1799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전선에서 브레시아 공략에 성공하여 러시아 귀국 후 근위기병대대(후에 연대)장이 되었다. 1805년 홀라브룬 전투에서는 5배가 넘는 적군과 전투를 벌여 휘하 장병 절반을 잃는 가운데에서 쿠투조프 장군의 본진 퇴각을 엄호해 적군을 퇴각시키는데 성공했다.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1805년 10월 19일 울름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로 카를 마크 폰 라이베리히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하자 쿠투조프는 철수를 고려하여 브륀에 도착한 증원군과 합류하려 했다.[6]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에게 단 하나의 연대로 비엔나를 방어하며 프랑스의 공격을 지연시키라고 명령했다.[6] 프랑스 원수 조아킴 뮈라와 장 란은 비엔나 근처 도나우 강에 자리를 잡기 위해 가짜 휴전을 제안했다.[6] 경비병들이 주의가 산만한 틈을 타 그들은 다리를 건너 도시를 장악했다.[6] 쿠투조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벅스호베덴이 지휘하는 러시아군과 합류해야 했기에, 프랑스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6] 바그라티온은 이를 위해 러시아군의 후위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6] 그의 연합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은 7,50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적은 이보다 5배나 많았다.[6] 바그라티온은 홀라브룬 북쪽 6km 지점, 쇤그라벤이라는 작은 마을 위의 언덕에 자리를 잡고 프랑스군이 전체 러시아군이 그들 앞에 있는 것으로 믿게 하기 위해 거대한 대열을 형성했다.[6] 사실, 뮈라 원수는 공격을 망설였고, 심지어 바그라티온의 휴전 제안에 동의하여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완전히 중단시켰다.[6] 이 지연은 쿠투조프가 그의 군대를 구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6]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뮈라의 완고한 행동에 격노하여 즉시 공격을 재개하라고 명령하여 11월 16일에 휴전을 종료했다.[6] 란과 뮈라의 45,000명의 선봉대는 바그라티온의 진지를 반복적으로 공격했지만, 언덕을 점령하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격퇴되었다.[6] 바그라티온 장군은 직접 반격을 이끌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6] 그의 군대가 심각한 사상자를 겪었고 파멸이 불가피해 보였지만, 바그라티온은 남은 병력을 그 지역에서 이동시켜 1805년 11월 18일에 브륀에서 나머지 연합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6] 그의 행동은 러시아군이 포위되어 궤멸되는 것을 막았다.[6]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바그라티온은 뮈라와 장 란이 이끄는 프랑스군 좌익과 대치했다. 연합군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바그라티온 역시 란 원수를 상대로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한 후 퇴각을 명령했다.[7] 란 원수는 뮈라 원수의 일부 병력의 지원을 받았다.[7] 그의 부대는 용감하고 격렬하게 싸웠지만 전투는 그 시점에서 패배했다.[7] 바그라티온은 전략적 철수를 시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지만, 뮈라 원수는 란의 건의를 거부하여 더 이상의 손실을 겪지 않도록 했다.[7] 아우스터리츠 전투 패배 후에도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 같은해 6월 프리틀란트 전투등에 참전하여 용맹과감한 전투를 지휘했다.
1807년 2월 7일과 8일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에일라우 전투에서 바그라티온은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8] 이 전투는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벌어졌다.[8]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후, 카멘스키 원수 휘하의 러시아군을 추격했다.[8] 일련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적을 궤멸시키겠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러시아군은 성공적으로 후퇴를 계속했다.[8] 1807년 1월 7일, 폰 베니히센 백작 장군이 러시아군의 전체 지휘권을 맡아 네 원수를 상대로, 그리고 베르나도트 원수를 상대로 성공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8] 베르나도트는 모루겐 전투 (1807년 1월 25일)에서 승리하고 후퇴함으로써 궤멸을 피할 수 있었다.[8] 나폴레옹은 베니히센의 방어되지 않은 좌익을 포위할 기회를 보고, 베르나도트에게 계속 후퇴하여 러시아군이 퇴각하는 것을 차단하도록 지시했다.[8] 운 좋게도, 코사크 기병대가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보낸 명령을 담은 프랑스군 전령을 가로채 바그라티온 장군에게 즉시 보고했다.[8] 바그라티온은 베니히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베니히센은 즉시 공격을 중단하고 후퇴했다.[8] 프랑스군은 추격했고, 몇 차례의 교전 끝에 1807년 2월 7일 에일라우에서 러시아군 전체와 대치하게 되었다.[8] 바그라티온은 도시에서 1마일 떨어진 고지를 점령하여 술트 원수의 제4군단과 뮈라 원수의 기병대를 마주했다.[8] 프랑스 연합군은 고지를 공격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바그라티온의 부대는 이를 격퇴했다.[8] 바그라티온 장군은 부하들에게 베니히센의 중포가 에일라우를 지나 러시아 본대와 합류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요구했다.[8] 오후에 프랑스군은 오제루 원수의 군단과 황실 근위대의 증원을 받아 총 4만 5천 명에 달했다.[8]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 직면한 바그라티온은 마침내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여 러시아 본대에 합류했다.[8] 바클라이 드 톨리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이 후퇴를 엄호했다.[8] 프랑스군은 바그라티온의 소규모 부대를 고지에서 몰아내는 것 이상의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8] 바그라티온의 지연 작전과 능숙한 철수는 러시아군이 궤멸을 피하고 결정적인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했다.[8]
2. 3. 핀란드 전쟁과 러시아-투르크 전쟁
1808년부터 1809년까지의 핀란드 전쟁 동안 바그라티온은 부크스호베덴 휘하의 러시아군 제21사단을 지휘했다. 스웨덴이 핀란드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키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 제국은 주도권을 잡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1808년 9월 9일(21일) 밤, 러시아군은 핀란드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했다. 바그라티온의 제21사단은 러시아군의 중앙을 형성하여 Hämeenlinna, Tampere, Pori를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 전진했다. 신속한 진격의 압박에 스웨덴군은 핀란드 깊숙이 급히 후퇴하기 시작했고, 끈질기게 추격당했다. 바그라티온의 부대는 최악의 기상 조건, 혹독한 추위, 눈보라, 숲의 잔해를 견뎌야 했다. 또한, 후퇴하는 스웨덴군은 장애물을 건설하고, 가능한 모든 식량원과 도로를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의 사단은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2월 22일(3월 6일) Hämeenlinna, 3월 1일(13일) Tampere, 1808년 3월 6일(18일) Pori를 점령하여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바그라티온은 200km 이상 진격하여 단 8일 만에 세 도시를 점령하고 보트니아 만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그의 기동은 스웨덴군을 북부와 남부 두 그룹으로 분열시켜 러시아군이 각 그룹을 차례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바그라티온은 주력 스웨덴군이 북부에 있다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공격을 위해 사단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총사령관 부크스호베덴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바그라티온의 제21사단을 포함한 우세한 병력으로 남부 스웨덴군을 공격하여 그 계획을 망쳤다. 스웨덴군은 여러 요새를 구축해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주력 스웨덴군은 아무런 피해 없이 Oulu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Turku 지역을 점령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08년 9월 바그라티온은 병에 걸려 작전 지역을 떠나야 했다. 그는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복무할 수 있게 되자마자 급히 복귀했다. 도착하자 그는 핀란드 서해안을 방어하는 러시아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1808년 9월, 스웨덴 사령부는 스웨덴 주력군을 위협하는 북부 러시아 전선에서 주의를 분산시키고 핀란드 서해안 남부를 확보하기 위해 투르쿠에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2,500명의 정예 부대가 올란드 제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투르쿠 해안으로 출발했다. 바그라티온은 적절한 시기에 대응하여 스웨덴군을 재빨리 바다로 몰아냈다. 스웨덴 지휘부는 증원군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투르쿠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구스타브 4세가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올란드 제도에 도착했다. 9월 14일(26일), 5,000명의 스웨덴 선봉대가 투르쿠에 상륙했다. 바그라티온은 적의 활동을 면밀히 감시했고, 스웨덴군이 해안에 발을 들여놓도록 내버려둔 후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적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소수의 병력만이 보트를 타고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 1808년 말까지, 심각한 사상자를 입은 스웨덴군은 전면적인 퇴각을 했고 핀란드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왕국은 싸움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6]
1809년, 러시아 사령부는 마침내 스웨덴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스웨덴 영토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군은 바그라티온, 미하일 바클레이 드 톨리, Шувалов, Павел Андреевич (1776)|파벨 안드레예비치 슈발로프(1776–1823)ru가 지휘하는 세 개의 작전 부대로 나뉘었다. 바그라티온의 17,000명 규모 군단은 보병 대대 30개, 기병 중대 4개, 코사크 600명, 야포 20문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공격은 투르쿠에서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건너 과감하게 진격하여 약 10,000명의 스웨덴군이 주둔하고 있던 요새화된 올란드 제도를 점령한 후,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스톡홀름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바그라티온은 그의 작전을 신중하게 계획했고 그의 부대에 신선한 음식, 따뜻한 옷, 탄약, 무기를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원정은 1809년 2월 26일 (3월 10일)에 준비되었고 다음 날 시작되었다. 올란드 제도에 대한 공격은 다섯 개의 공격 부대로 이루어졌다. 네 개는 정면 공격에 참여했고, 다섯 번째 부대는 남쪽에서 올란드 제도를 우회했다. 스웨덴군은 저항을 거의 하지 않고 바그라티온의 진격을 막기 위해 주요 올란드 섬으로 후퇴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를 위해 스웨덴 사령관 칼 폰 뒈벨른은 휴전 협상을 제안했다. 바그라티온은 폰 뒈벨른의 제안의 유일한 목적이 자신의 움직임을 지연시키려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를 거절했다. 협상을 마친 후, 그는 부대에게 더욱 빠른 속도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포위될 것을 우려한 폰 뒈벨른 장군은 올란드 제도를 포기했다. 바그라티온의 군대에 쫓겨 후퇴는 곧 파괴적인 패주로 바뀌었고, 탄약, 무기 및 장비를 버려두고 갔다.
스웨덴을 위협하기 위해 바그라티온은 야코프 쿨네프 소장 휘하의 기병대 400명에게 스웨덴 본토까지 추격하도록 명령했다. 쿨네프는 스톡홀름에서 불과 70 km 떨어진 스웨덴 도시 그리스레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예상치 못한 사건의 전개는 스웨덴 지도부와 국민에게 충격과 혼란을 가져왔고, 그들은 스웨덴 영토에 러시아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스톡홀름은 요새화되었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막기 위해 군대가 신속하게 편성되어 파견되었다. 쿨네프의 스웨덴 침공이 전체 전쟁의 과정에 결정적인 심리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 계획은 바그라티온의 기대를 넘어 성공했다. 동시에 다른 러시아 군단도 목표를 달성하여 스웨덴 측은 핀란드에서 모든 주장을 잃고 평화 회담에 강요되었다. 바그라티온은 그의 작전 수행에 대해 극찬을 받았고 보병 대장으로 승진했다.[6]
1809년, 바그라티온은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몰다비아 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과 싸워 보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2. 4. 1812년 조국 전쟁
1812년 바그라티온은 서부 제2군을 지휘했으나, 모길료프(1812년 7월 23일)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지휘하의 주력 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보로디노 전투(1812년 9월 7일)에서 러시아군 좌익을 지휘했으나 여기서 치명상을 입었다. 9월 12일 상처로 인해 숙모의 영지였던 시마에서 죽었다.[10]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초기, 바그라티온은 벨라루스 빌레이카 근처에 배치된 제2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프랑스군은 빌뉴스(Vilnius)로 진격하여 바그라티온의 부대를 전체 지휘를 맡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부대와 분리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이후 예롬, 다부 및 외젠 원수 등이 수행하는 망치와 모루 작전을 통해 바그라티온의 제2군을 격멸하려 했다. 하지만 다부 원수가 바그라티온의 군대와 마주쳤다고 잘못 판단했을 뿐, 실제로는 도크투로프 장군의 기병대 일부와 마주쳤을 뿐이었다. 혼란, 잘못된 추측, 정보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반대편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반되는 명령과 정보 부족으로 바그라티온은 다부의 부대로 맹목적으로 진격할 뻔했다. 진흙길, 보급 문제, 날씨, 프랑스군 간의 지휘권 다툼 등으로 바그라티온은 도크투로프와 합류하여 4만 5천 명의 병력을 지휘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이미 상당수의 병력을 소규모 전투, 악천후 및 질병으로 잃은 다부 원수는 예롬이 먼저 지원하지 않고는 바그라티온과 싸우기를 꺼렸다. 프랑스 기병대는 플라토프 장군에게 두 번이나 패배하여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바그라티온 역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양측 모두 상대방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다. 다부는 바그라티온이 약 6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바그라티온은 다부가 7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그라티온은 알렉산드르 황제의 참모진과 바클레이(바클레이는 알지 못했다)로부터 동시에 명령을 받아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전반적인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갖지 못했다. 이 혼란스러운 일련의 명령은 바그라티온을 바클레이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었고, 이는 나중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전쟁 장관으로서 전체 지휘권을 부여받았지만, 바그라티온은 더 선임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차르 알렉산드르와 바클레이로부터 동시에 명령을 받은 이유이다.
프랑스군의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를 향한 강행군의 빠른 진격은 드 톨리가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방해했고, 그는 의도했던 매번 후퇴해야 했다. 총사령관은 바그라티온의 수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벌이기를 거부했다. 드 톨리가 계속해서 전투를 거부한 것은 나중에 그의 자리에서 해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모길레프 전투는 살타노프카 전투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바그라티온이 알렉산드르 황제에게 프랑스에 대한 선제 공격을 제안한 후 러시아 주력 부대와 합류하려다 실패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그의 제2군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제1군에 도달하려다 가로막혀 드네프르 강에서 다부 원수와 교전했다. 모길레프에서 프랑스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바그라티온은 2만 명 규모의 제7군단을 니콜라이 라예프스키 장군을 지휘하여 투입했다. 이에 맞서는 다부 원수는 총 2만 8천 명 규모의 5개 사단으로 구성된 군단을 이끌고 살타노프카 주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다부는 접근하는 러시아군을 기다리며 엄청난 머스킷 총탄 세례와 포격을 가했다. 라예프스키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군의 굳건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전선 전체에서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다부는 이어 반격을 가하여 제7군단을 물러나게 했지만, 라예프스키는 바그라티온이 그의 군대가 측면과 후방에서 다른 프랑스군에게 공격을 받자 전면적인 퇴각 명령을 내릴 때까지 반복해서 방어했다. 그는 완전한 포위를 피하기 위해 신속하게 스몰렌스크로 철수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바그라티온은 다부의 병력과 약간의 증원군에 불과했음에도 나폴레옹의 주력군과 싸우고 있다고 믿고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 이는 러시아군 간의 부실한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바그라티온의 철수 결정은 제2 서부군을 파괴하려는 나폴레옹의 계획을 좌절시켰고, 그는 결국 스몰렌스크에서 통합된 러시아군과 싸워야 했다. 바그라티온은 또 다른 공격을 우려하여 스몰렌스크로 후퇴하여 바클레이가 증원해 줄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1812년 8월 14일, 뮈라, 다부, 네 원수는 급히 건설된 부교를 통해 드네프르강을 건넜다. 계획은 스몰렌스크 시를 향해 빠르게 진격하여 싸움 없이 점령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를 보급과 보충의 중요한 기지로 보고, 여기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바클레이 드 톨리의 지휘 하에 있는 러시아 주력 부대의 후방을 공격하려 했다. 이 도시는 러시아 측에게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중요성도 있었다. 불행히도 프랑스에게는, 상반된 명령과 소통의 실패로 바그라티온은 이미 명령을 어기고 서쪽으로 진격하는 대신 남쪽의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8월 16일, 프랑스군은 바그라티온의 군대가 도시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드 톨리의 군대가 도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역사적 기념물의 파괴를 피하기 위해 도시 밖에서 싸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스몰렌스크 전투는 1812년 8월 16일에 시작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세 군단은 도시 외곽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곧 격퇴되었다. 지속적인 포격은 대부분 나무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를 불태웠지만, 프랑스군은 사다리와 기타 장비가 부족하여 외곽과 성벽을 넘어가지 못했다. 공격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면서, 러시아 수비대는 그들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화재로 인해 바그라티온과 드 톨리는 1812년 8월 18일에 불타는 스몰렌스크를 포기해야 했다. 전투는 결정적인 결론 없이 끝났으며, 러시아군은 후퇴했고 나폴레옹은 도시를 정복했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었기에 곧 떠났다.
침략 초부터 바그라티온은 이 침략이 평범한 침략이 아니라 전 국민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현지 시민들은 특히 스몰렌스크 주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소규모 프랑스군에 맞서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규모의 경무장 농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분견대의 산발적인 공격은 이미 바그라티온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그들의 결단력과 효과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비정규군과 정규 러시아군의 현명한 협력이 나폴레옹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부관이자 후사르 연대 사령관인 D.V. 다비도프 부대령은 게릴라 운동에 대한 바그라티온의 견해에 동의했고 가능한 행동 방침을 제안했다. 바그라티온은 그 제안을 승인했지만, 쿠투조프에게 계획을 제시했을 때, 최고 사령관은 그러한 작전에 매우 제한된 수의 병력만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다비도프는 자신의 부대의 보급과 행동에 대한 모든 관리와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했지만, 자신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원에 불만을 품고 바그라티온에게 최소 1,000명의 코사크를 줄 것을 요청했다. 바그라티온은 자신의 장교의 요청을 들어주고 그 작전을 직접 수행하고 싶었지만, 쿠투조프의 명령을 어기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겉핥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 3,000명을 주겠지만, 그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습니다. 크냐즈(공작)는 스스로 그룹의 구성을 정의했기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7] 그 후 바그라티온은 다비도프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썼다.
> 아흐티르카 후사르 연대 다비도프 부대령에게.
>
> 이것을 수령한 후, 카르포프 소장으로부터 코사크 150명과 아흐티르카 후사르 연대의 후사르 50명을 데려가라.
>
> 적을 교란하고 보급품을 빼앗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측면뿐만 아니라 중앙과 후방에서도 운송과 공원을 뒤집고, 페리를 파괴하고 모든 구제책을 빼앗도록 노력하라. 한마디로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허가를 해주었으니 당신이 민첩함과 근면함을 증명하고 나의 선택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편리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공식 보고서를 보낼 수 있다. 아무도 당신의 움직임에 대해 알 수 없어야 한다. 가장 풀리지 않는 비밀로 덮어두도록 노력하라. 당신의 지휘부의 식량에 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7]
바그라티온은 또한 바실리치코프 장군과 카르포프 장군에게 배정과 최고의 코사크 및 후사르 부대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에 관한 서신을 썼다. 다비도프의 요청에 따라 그는 스몰렌스크 지방 지도의 사본을 부대령에게 제공했고, 헤어질 때 젊은 장교에게 행운을 빌었고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 그의 자신감은 게릴라 운동이 광범위하게 발전하면서 곧 강조될 것이다. 곧 다비도프의 운동 외에도 도로호프 장군, 피셔 대위, 세슬라빈 대위, 쿠다셰프 대령 등 다른 그룹들이 등장했다. 이 그룹들은 농민 게릴라 그룹의 활동과 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성공적으로 노력했다. 바그라티온은 이러한 활동에 대한 최초의 실제 전술 지침의 저자이자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게릴라 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이 되었다.[7]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가는 스몰렌스크 길을 점령할 것을 우려한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과 그의 제2군에게 좌익을, 바클레이 드 톨리에게 제1군으로 우익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강하고 프랑스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에 배치된 제1군 외에는 바그라티온 군대는 지형적 이점을 전혀 갖지 못했고, 더 유리한 위치로 변경해 달라는 그의 요청은 쿠투조프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래서 그는 공병에게 네 개의 큰 레당(Redan)을 건설하도록 명령하여 스스로 지형적 이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또한 바그라티온 플레슈(Bagration flèches)로 알려진 네 개의 화살촉 모양의 후면이 열린 토목 공사로, 콜로차 개울 앞의 왼쪽에 계단식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었다. 1812년 9월 7일 러시아 중앙에 대한 대규모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다부 장군은 오전 6시경 플레슈에 두 개의 사단을 투입했다. 102문의 포를 지원받은 25,000명의 병력이 50문의 포를 가진 8,000명의 러시아 수비대와 맞섰다.
진격하는 동안 다부의 사단은 콜차 반대편에 배치되어 바그라티온의 방어선을 지원하는 러시아 포병의 집중 포격과 요새 앞에 배치된 러시아 예거 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사상자를 입었고, 다부가 자신의 부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 직접 돌격을 지휘하기 위해 달려들면서 작전은 무너질 뻔했다. 두 번째 시도로 그는 오전 7시에 가장 남쪽에 있는 플레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바그라티온은 라예프스키와 그의 제7군단을 다시 한번 다부와 맞서 싸우도록 명령했고, 이번에는 프랑스군이 측면을 공격받아 두 번째로 격퇴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미 바그라티온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러시아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최고라고 불렀지만, 바그라티온의 완강한 저항에 놀랐다. 나폴레옹은 세 번째 공격을 위해 미셸 네 원수와 장-앙도슈 쥐노 장교를 다부에게 증원하는 동안 바그라티온은 그의 부대를 재배치하고 제2 척탄병 및 제2 기갑 사단을 예비로 배치했다.
제3 보병 사단은 프랑스군이 그의 측면을 공격할 가능성을 대비하여 세몐노프스코예에 예비로 남아 있었다. 플레슈에서 치열한 전투를 지켜본 쿠투조프는 포병 예비대로부터 제2 및 제5 보병 군단 일부를 100문의 포와 함께 파견했지만, 그들의 도착에는 한두 시간이 걸릴 것이었고, 이는 바그라티온이 혼자서 싸워야 함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플레슈를 점령하라고 요구했고, 대규모 포격과 함께 보병과 기병의 동시 공격으로 세 번째 공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오른쪽과 맨 왼쪽 플레슈를 점령했지만 바그라티온의 부대에 의해 다시 몰아냈다. 러시아군을 포위하고 기병 군단으로 바그라티온의 후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원수 또한 투치코프의 제3 보병 군단에 의해 격파되었다. 수비대는 오전 9시에 그들의 위치를 회복했다. 세 번째 실패로 나폴레옹은 분노했고, 이제 조아생 뮈라 원수를 작전에 투입하여 오전 9시에 네 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 나폴레옹군은 바그라티온의 부대를 플레슈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몐노프스코예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때 쿠투조프가 바그라티온을 돕기 위해 보낸 제2 및 제5 군단이 마침내 도착했고, 바그라티온은 모든 가용 병력을 프랑스군에 투입하여 모든 점령지에서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 후, 세 차례의 프랑스군 공격이 더 격퇴되었고, 투치코프 장군은 다섯 번째 공격에서 전사했다. 증가하는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바그라티온의 위치를 계속 공격했다. 그의 부대는 소총 사격뿐만 아니라 근거리에서 포병의 산탄 사격에도 피해를 입었다. 시체와 부상병들이 쌓여 기병과 보병이 전장에서 제대로 기동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엘리트 근위대를 보내 자신의 부대의 사기를 북돋아 줄 것을 고려했지만, 그들 또한 무너지는 것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주저했다. 정오에 프랑스군은 18,000명의 러시아 수비대와 300문의 포에 맞서 약 45,000명의 병력과 400문의 포로 여덟 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바그라티온은 공격자들을 과감하게 맞이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아마도 전투 전체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었고, 역사가 부투르린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 거의 초자연적인 용기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보병, 기병, 양측의 포병들은 서로 섞여 끔찍한 광경을 연출했고, 병사들의 거대한 덩어리가 사적인, 격렬한 절망 속에서 고군분투했다.[8]
바그라티온은 그의 부대 전체에 반격을 명령했지만, 심각하게 수적으로 열세였고 천천히 밀려났다. 프랑스 제57선 보병 연대는 모든 방향에서 소총 사격으로 거의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슈를 계속 공격했다.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바그라티온으로부터 두 번의 "브라보" 소리를 들었고, 그때 제2 사령관은 다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다.[8] 그의 부하들은 일어난 일을 숨기려 애쓰면서 재빨리 그를 전투에서 벗어나 안전한 장소로 옮겼지만, 바그라티온의 부재는 곧 눈에 띄었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의 부대의 사기는 점점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 바그라티온은 제2 기갑 사단의 두카 장군의 성공을 기대하며 전투가 결정될 때까지 현장에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기갑병들은 네 원수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바그라티온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제2군 내부에 혼란과 사기 저하를 가져왔다. 그 관리 체계가 무너져 러시아군은 혼란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포기하기 시작했고 압도적인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후퇴했다. 바그라티온 플레슈는 버려져 프랑스군에게 넘겨졌지만, 그들에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작전에 참여한 60,000명의 프랑스 병사 중 약 30,0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지만 더 적었다. 그러나 전투는 양측이 처음 배치 구역으로 돌아가면서 결정적이지 않게 끝났다. 전투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 능력과 자원을 소진시켰고, 결국 그는 비어 있는 모스크바에 진입하면서 러시아를 두 번째 틸지트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었다.[9]
3. 전술 및 전략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바그라티온은 혁신적인 전술가였다. 프랑스와의 전투 대부분이 방어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동적인 공격전을 선호했다. 그는 자신이 구식이라고 여긴 진지 구축 전술을 거부하고, 대신 러시아 군에게 전략적 목표와 전술 기동을 부여하여 적에게 반응하거나, 대응하거나, 심지어 조직할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해 속도와 정확성이 가장 중요한 빠른 대결을 항상 추구했다.[1] 이로 인해 전반적인 지휘를 맡아 참호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리는 데 주로 의존했던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장군과의 긴장과 경쟁이 심화되었다. 바그라티온이 적용한 교리는 당시 공격 및 방어전 모두에 대한 훌륭한 개념이었으며, 때로는 그가 직면한 불가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퇴조차도 동일하게 훌륭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바그라티온의 전략적 견해는 전술적 군사 행동의 성격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정의했다. 1812년 6월 25일에 발표된 제2 서부군에 대한 명령에는 프랑스군이 러시아 영토를 침공할 경우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Нам нужно атаковать смело, быстро, не ввязываться в перестрелку.|남 므 누즈노 아타코바티 스멜로, 비스트로, 네 브뱌지바티샤 브 페레스트렐쿠.|우리에게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공격하여 사격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ru 포병은 정확하게 사격해야 하며, 비정규군은 적의 측면과 후방을 포위해야 한다. 정규 기병대는 신속하게 공격하되, 작은 부대로 분열되지 않고 협동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해야 한다. 기병대는 예비대와 측면을 확보하는 것을 잊지 않고 공격을 서로 지원해야 한다. 기병대는 체스 형태의 대형으로 배치되어야 한다.[1]
공격은 종대로 형성된 부대로 수행되었다. 바그라티온은 병사들이 팔꿈치로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너무 밀집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밀집된 전투 대형으로 부대를 배치할 것을 권고했다. 적 기병대의 반격의 경우, 바그라티온은 대대적인 덩어리 또는 사각형 대형, 즉 "카레"를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적 기병대가 보병을 공격할 때, 사방이 닫힌 종대 또는 '카레' 대형의 대대를 형성하는 데 단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모든 공격은 함성과 함께 이루어져야 했고, 접근하는 동안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해야 했다.
1812년 7월에는 제2군 전체에 "전투 당일 보병 장교를 위한 수칙"이 배포되었다. 이 문서는 공격을 전투의 기본 형태로 인식했다. 공격 전투의 주요 징후는 백병전 공격이었으며, 패배한 적에 대한 강력한 추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수칙은 별도의 열과 종대에서의 행동, 그리고 조준 사격 수행에 대한 문제를 자세히 고려했다. 소규모 부대가 그들의 종대와 긴밀한 소통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명시했으며, 전진은 사단 또는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다. 숲에서 별도의 열로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경우, 반격하는 적의 측면을 갑자기 포위할 기회를 갖기 위해 측면 중 하나 뒤에 예비대를 유지할 것을 제안했다.
별도의 열로 행동하는 적 기병대의 공격은 150보 이내로 접근하도록 허용한 후 사격을 가해야 했다. 그 후에는 열 명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사격과 칼날로 적을 격퇴해야 했다. 증원군이 도착하면 종대에서 사각형 대형으로 재배치하여 150보 거리에서 적 기병대에게 사격했다. "수칙"은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여 그들의 의무와 선서를 상기시키고, 군사 행동 중 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을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끈기와 용기는 다른 모든 군사적 재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고립되었다!"와 같은 재앙과 공황에 대한 모든 소문은 심한 처벌을 위협하며 절대 금지되었다. "수칙"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Храбрый никогда не бывает окружен. Куда бы неприятель не обратился, везде обращай грудь против него и иди на поражение.|흐라브리 니코그다 네 비바에트 오크루존. 쿠다 비 네프리야텔 네 오브라틸샤, 베즈데 오브라샤이 그루디 프로티프 네고 이 이디 나 포라제니에.|용감한 사람은 결코 고립되지 않는다. 적이 어디로 가든, 가슴을 돌려 그를 따라가 격파하라.ru
바그라티온은 진보된 전술을 끈기 있게 도입했고, 구식 진지 구축 전술을 폐지하고 열 전술을 별도의 열과 결합하여 적용했다. 공격 전투의 가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바그라티온은 동시에 방어 작전을 수행할 기회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임무에 대한 계획에 창의적으로 접근하여, 특정 상황에 정확한 답을 제공하는 그러한 형태의 전투를 적용했다.
바그라티온은 1799~1807년 전쟁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러시아군의 후방 경계 및 전방 경계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99년 이탈리아 전역과 스위스 전역 중의 전진 및 후방 경계 전투, 그리고 1805~1807년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바그라티온의 지휘하에 러시아군이 수행한 교전은 러시아 군사 예술의 가장 훌륭한 성과에 속한다.
바그라티온은 병사들의 용기와 주도성을 개발하고, 명령을 신속하고 숙련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군대 훈련과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병사들의 건강에 끊임없이 신경을 썼으며, 그들이 잘 입고 제때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바그라티온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 국왕, 황제, 그리고 나의 지휘관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은 내가 복무의 모든 단계에서 따르고 복종하는 가장 신성한 의무입니다... 나는 병사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용기를 존경하며, 동시에 질서와 규율을 요구합니다."
4. 사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보로디노 전장에 그의 영예를 칭송하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장군의 유해는 그가 죽었던 장소로 옮겨져 지금도 그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을 당했지만, 그 후 복원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지방 미술관에서 뼈와 옷의 파편들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1973년 9월 27일, 러시아의 천문학자 류드미라 제르누이프가 발견한 소행성이 3127 바그라티온으로 명명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바그라티오노프스카야 모스크바 지하철역, 필료프스키 공원 구역의 바그라티온 통로, 도시 건립 850주년을 기념하는 바그라티온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러시아의 여러 도시의 많은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23년 8월, 쿠투조프스키 프로스펙트 근처의 새로운 고속도로가 바그라티온 대로로 명명되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최소 15척의 선박이 P.I. 바그라티온의 이름과 관련되었다.
4. 1. 바그라티온 작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4년 6월 22일 독일 중앙집단군을 공격하기 위한 소련군 공세 작전명으로 바그라티온을 선택했다.[1] 이 작전은 성공하여 나치 독일군은 벨라루스에서 철수했다. 이후 소련은 동프로이센 북부를 병합하고, 1807년 아일라우 전투가 벌어진 당시 독일 도시였던 프로이시쉬 아일라우(현재 칼리닌그라드)를 그를 기념하여 바그라티오노프스크로 개칭했다.[1]4. 2. 현대의 평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보로디노 전장에 그의 영예를 칭송하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장군의 유해는 그가 죽었던 장소로 옮겨졌고, 지금도 그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을 당하였지만 그 후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지방 미술관에서 뼈와 옷의 파편들을 수습하였다고 한다.이오시프 스탈린은 1944년 6월 22일 독일 중앙집단군을 공격하기 위한 소련군 공세작전명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명명했다. 작전의 성공적 진행으로 인해 나치 독일군은 벨라루스까지 후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련은 동프로이센 북부를 병합하고 (칼리닌그라드) 그때까지 독일의 도시였던 프로이슈-아일라우(1807년 아일라우 전투의 무대)를 그를 기념하여 바그라티오노프스크라고 개명했다.
1973년 9월 27일 러시아의 천문학자 류드미라 제르누이프가 발견한 소행성이 3127 바그라티온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레프 톨스토이의 1869년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조연이다. 1960년대 러시아 영화 전쟁과 평화 (영화 시리즈)에서 그는 줄리 초코넬리제가 연기했으며, 1985년 러시아 전기 영화 《바그라티오니》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전쟁과 평화 (2016년 TV 시리즈)의 BBC 2016년 TV 각색판에서는 핍 토렌스가 연기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바그라티오노프스카야 모스크바 지하철역, 필료프스키 공원 구역의 바그라티온 통로, 도시 건립 850주년을 기념하는 바그라티온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러시아의 여러 도시의 많은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23년 8월, 쿠투조프스키 프로스펙트 근처의 새로운 고속도로가 바그라티온 대로로 명명되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최소 15척의 선박이 P.I. 바그라티온의 이름과 관련되었다.
다음은 바그라티온에 대한 인물들의 평가이다.
- "러시아에는 훌륭한 장군이 없다. 유일한 예외는 바그라티온이다." (나폴레옹)
- "바그라티온 공작은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최고의 지위에 어울린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 "바그라티온 – 러시아 군대의 사자." (알렉산드르 체르니쇼프)
5. 유산
니콜라이 1세는 보로디노 전장에 그의 영예를 칭송하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바그라티온 장군의 유해는 그가 죽었던 장소로 옮겨졌고, 현재까지 그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을 당했으나, 이후 복원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지방 미술관에서 뼈와 옷의 파편들을 수습하였다고 한다.[1]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4년 6월 22일 독일 중앙집단군을 공격하기 위한 소련군 공세 작전명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명명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나치 독일군은 벨라루스까지 후퇴했다. 소련은 동프로이센 북부를 병합하고, 1807년 아일라우 전투가 벌어졌던 독일 도시 프로이슈-아일라우를 바그라티온을 기념하여 바그라티오노프스크로 개칭했다.[1]
1973년 9월 27일, 러시아의 천문학자 류드미라 제르누이프가 발견한 소행성이 3127 바그라티온으로 명명되었다.[1]
모스크바에서는 바그라티오노프스카야 모스크바 지하철역, 필료프스키 공원 구역의 바그라티온 통로, 도시 건립 850주년을 기념하는 바그라티온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러시아의 여러 도시의 많은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2023년 8월, 쿠투조프스키 프로스펙트 근처의 새로운 고속도로가 바그라티온 대로로 명명되었다.[1]
20세기와 21세기에 최소 15척의 선박이 P.I. 바그라티온의 이름과 관련되었다.[1]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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